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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의 유용한 바보들 (Les idiots utiles du FN) - 쟈크 랑시에르와의 인터뷰

수정일
2023.12.31
작성자
오영인
조회수
52
등록일
2023.12.31
FN의 유용한 바보들 (Les idiots utiles du FN) - 쟈크 랑시에르와의 인터뷰
- 에릭 아에쉬망 (ÉRIC AESCHIMANN), Nouvel observateur 2630호 (2015년 4월 2일자)

[철학자 쟈크 랑시에르는 일부 지식인들이 이야기하는 “공화주의”가 지난 몇 년간 FN의 요람이 되었다고 본다. 그는 어떻게 보편적 가치들이 인종주의 담론으로 탈선하였는지를 설명한다.

1940년에 태어난 쟈크 랑시에르는 1970년대 초반 전통적인 맑스주의와 단절하기 이전까지 알뛰세르의 제자였다. 해외, 특히 미국에서 영향력이 있는 그는 개인들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고 특정한 엘리트가 보통 사람들 보다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꾸준히 비판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무지한 스승 (le Maître ignorant, 1987)“, “감성의 분할 (le Partage du sensible, 2000)“,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la Haine de la démocratie, 2005)“, ”해방된 관객 (le Spectateur émancipé, 2008)” 등이 있다. ]

Q. 3달 전, 프랑스는 ‘표현의 자유’ 및 ‘더불어 삶’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는 다시 한 번 FN(역주: 프랑스 극우정당)의 약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사건이 짧은 기간 동안 연이어 발생한 것을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랑시에르 - 그것이 모순적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물론, 샬리 엡도에 대한 테러를 비판하고 뒤이은 대중들의 반응에 대해 좋게 평가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만장일치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에는 혼란이 있습니다. 실제로, 표현의 자유는 국가가 스스로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 표현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면서, 개인들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원칙입니다. 반면, 1월 7일 샬리 엡도에 대한 테러를 통해 짓밟힌 원칙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총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 개인들과 집단들이 더불어 살고 상호존중하는 것을 배우는 방법에 대한 원칙인 것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으로 진영을 나누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지난 수 년간 “좋은 프랑스 사람”, 공화국 지지자, 세속주의, 표현의 자유를 전통주의자, 이슬람주의자, 불관용, 남녀차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는 이민자들과 대립시키면서 프랑스 국민 일부를 모욕하는 수단으로 위대한 보편적 가치들을 이용하는 선거운동 방식에 또 하나의 장을 추가했습니다. 흔히 보편주의를 공통적인 삶의 방식으로 제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보면, 보편주의는 독점되고 조작되었습니다. 특정한 집단의 구별되는 상징이 됨으로서, 보편주의는 특히 히잡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을 통해 특정집단을 비방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1월 11일의 행진도 이러한 일탈과 거리를 두지 못했습니다. 행진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인종주의적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아내었습니다.

Q. 그러니까 세속주의 공화주의 모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도와 달리 FN의 토양을 만들어주었다는 의미인가요 ?

랑시에르 - FN이 « 탈악마화 »되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너무 공공연한 인종주의자들을 떼어놓았다는 겁니까 ?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FN의 생각들과 공화주의의 전통을 존중하고 계승한다고 간주되는 생각들 사이의 차이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20 여 년 동안, 외국인혐오 또는 인종주의를 위한 논리들이 소위 « 공화주의자 »라고 하는 일부 좌파 지식인들로 나왔습니다.
FN은 이민자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훔쳐가고 있다거나 그들이 불량배들이라고 더 이상 이야기 할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세속주의자가 아니며, 우리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고 있고, 전통주의자들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위대한 보편적 가치들은 (세속주의, 모두를 위한 공동의 규칙들, 남녀평등 등) 이들 가치에 속한 “우리”들과 속하지 않은 “그들”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FN은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아주 고상한 외양으로 제공되는 논리들을 통해 자신들의 외국인혐오 논리를 간단하게 축약할 수 있습니다.

Q. 당신 주장에 따르면, 타락한 것은 세속성의 의미 그 자체이군요. 당신은 세속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랑시에르 - 19세기에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세속성은 1850년 채택된 팔루(Falloux) 법 이후 카톨릭 교회가 미치고 있던 영향으로부터 학교교육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세속성은 이 영향력을 파괴하기 위해 취해진 특정한 정책수단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성을 하나의 위대한 보편적 가치로 만들자고 선택한 것은 1980년대부터입니다. 사실, 세속성은 국가와 카톨릭 교회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인데 말이지요.
엄청난 인위적 조작은 세속성을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하나의 규칙으로 바꾼 것입니다. 세속적이어야 하는 것이 이제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속성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까요 ? 머리에 쓰는 것을 가지고… 제가 어렸을때, 견진성사 날에는 성사에 쓰이는 완장을 착용하고, 사진(전도지)을 나누어 주면서, 카톨릭 교도가 아닌 친구들을 찾으러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아무도 이것이 세속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죠. 세속성 논쟁의 쟁점은 공립학교에는 공공재정을, 사립학교(카톨릭계 학교)에는 민간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재정의 문제였습니다. 개인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려 하고, 눈에 보이는 외양을 통해 일부 국민을 낙인찍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세속성 개념을 위해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사이의 관계에 관련되었던 세속성은 잊혀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망상을 밀어붙여서 어린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히잡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이렇게 낙인을 찍으려는 의지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

랑시에르 - 다양한 원인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연결되어 그 문제가 격화시키고 있는 상호적인 불관용의 형태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원인은 60-70년대의 위대한 희망들과 소위 « 사회주의자들 »의 당이 집권을 하면서 이 희망들이 사라진 것에서 만들어진 « 좌파들의 거대한 원망 » 입니다. 모든 공화주의, 사회주의, 혁명주의, 진보주의의 생각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거스르는 방향으로 변했습니다. 이 생각들은 그들이 되었어야 하는 것의 반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더 이상 평등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아닌 우둔하고 뒤처진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해 차별하고, 불신하고, 무시하기 위한 무기가 된 것입니다. 불평등의 증가에 맞서 싸울 수 없자, 사람들은 불평등의 여파를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격을 떨어뜨림으로서 (역주 : 그들은 원래 그래, 또는 어쩔 수 없어…) 불평등의 증가를 정당화시킵니다.
맑스주의적 비판이 민주적인 개인과 전제적인 소비자에 대한 비난(소비할 것이 가장 적은 사람들을 겨냥한 비난)을 위해 역이용되었던 방식을 생각해봅시다 (역주 : 정확하게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지 모르겠음). 공화적 보편주의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낙인 찍으면서 반동적 생각으로 바뀌는 것도 같은 논리를 보여줍니다.

Q.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보면 히잡 착용에 대한 반대가 정당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

랑시에르 - 문제는 공립학교의 사명이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에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경우, 공립학교는 마찬가지로 모든 노동자들과 프랑스 사회의 모든 피지배계층을 해방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 사회적, 성적, 인종적... 모든 종류의 억압들이 존재합니다.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원칙은 다른 형태의 억압들을 더 공고화하기 위해 특정한 하나의 형태의 억압을 겨누는 것입니다. 여성주의를 « 공동체주의 »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곧이어 히잡 반대 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성주의자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슬람 세계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물론 문제적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억압적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우선 그것을 겪는 당사자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예속에 맞서 싸웁니다. 위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해방시키지 않습니다.

Q. FN 문제로 다시 돌아와보지요. 당신은 종종 « 민중 »들은 자연스럽게 인종주의적일 것이라는생각을 비판하곤 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민자들은 « 아래로부터의 » 인종주의 보다는 « 위로부터 »의 인종주의 즉, 외모에 따른 검문, 교외지역으로의 밀려남, 외국이름으로 주거나 일자리를 찾기 어려움 등의 피해자인 건가요 ? 하지만 25%의 유권자들이 모스크 건설을 동결시키겠다는 정당에 투표하는 상황이라면, 어찌되었든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외국인혐오 충동이 작동한다는 신호는 아닐까요 ?

랑시에르 - 먼저, 이러한 외국인혐오 충동은 극우적인 유권자 집단을 상당한 정도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 1962년 3월 19일 (알제리 전쟁을 종식시킨 에비앙 협정 날짜) » 거리의 이름을 없애겠다는 FN 의 시장과 식민화의 긍정적 측면을 교육시키자는 UMP (역주 : 프랑스 우파 정당. 전임 사르코지 대통령의 소속 정당) 의원들, 학교 급식에서 돼지고기가 없는 메뉴를 반대한 사르코지, 대학에서 히잡을 쓴 여학생들을 내쫒기를 바라는 소위 « 공화주의 » 지식인들 사이에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 다른 한편으로는 FN에 대한 투표를 인종주의나 외국인혐오주의을 표현하는 것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너무 단순합니다. 대중적인 감정의 표현 수단이기에 앞서, FN은 5공화국 헌법에 의해 만들어진 프랑스 정치체제의 구조적 여파입니다. 작은 소수 집단이 국민의 이름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현 체제는 자동적으로 « 우리는 이 게임의 바깥에 있어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정치적 그룹에게 공간을 열어줍니다. FN은 공산주의와 극좌파가 사라진 이후 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대중의 « 속감정 »으로 말하자면, 누가 그것을 측정합니까 ? 저는 독일의 인종혐오주의 운동인 Pegida에 해당하는 운동이 프랑스에는 없다는 정도만 지적하겠습니다. 또한 저는 종종 언급되는 1930년대와 유사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프랑스에서 양차대전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극우파 민병대들과 비교할 만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Q. 이야기를 들어보니, FN에 반대하는 투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네요…

랑시에르 - FN을 만들어내는 시스템, 그리고 정부 관료들과 지식인 계급의 급증하는 우경화를 감추기 위해 FN에 대한 비판을 이용하는 전술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Q. FN이 집권할 수 있다는 가설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

랑시에르 - FN을 우리 사회의 제도적 논리가 보여주는 불균형의 산물로 분석한 이후, 제 가설은 FN이 사회시스템에 통합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FN과 현 시스템의 주요 세력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Q. FN이 집권하게 되면, 이는 프랑스 사회의 가장 취약계층인 이민자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영향이 있을 텐데요…

랑시에르 - 예.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FN이 수 십만, 또는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을 그들의 « 고향 »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대규모 추방을 조직할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FN은 이민자에 반대하는 동네 백인양아치들이 아닙니다. 이들의 유권자층은 이민자 사회를 포함해서 사회 모든 분야로 확장되었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행위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UMP-FN의 연립정부가 UMP 단독정부와 크게 다를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Q. 지난 지방선거가 가까워 오면서, 마뉴엘 발 총리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 잠들어 있다 »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 지식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 전투에 뛰어들어야 할 이 나라의 위대한 양심들, 문화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 좌파는 어디에 있는가 ? » 라고 외쳤는데요. 당신도 여기에 관련된다고 느끼십니까 ?

랑시에르 - « 좌파는 어디에 있는가 ? » 라고 사회주의자들(사회당원들)은 묻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좌파는 그들이 이끌고 간 곳에 있지요. 즉, 망했지요. 사회당의 역사적 역할은 좌파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미션은 달성되었습니다. 마뉴엘 발 총리는 지식인들이 무엇을 하냐고 묻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지식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지식인들의 침묵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일단의 지식인들이 엄청나게 말을 많이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타가 되었고, 신성시되었죠. 그들은 히잡 반대와 세속성에 대한 분노에 찬 운동들에 광범위하게 기여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말이 많았을 뿐입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지식인에게 호소하는 것은 지성의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천치들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멍청이와 뒤떨어진 사람들로 구성된 대중들에 스스로를 반정립시켜야만 그런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이는 « 아는 자 »와 « 모르는 자 » 사이의 대립을 지속시키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인데요, FN이 특정한 하나의 표현일 뿐인 불신과 경멸의 사회에 맞서는 싸움을 원한다면, 이러한 대립이야 말로 끊어내어야 할 바로 그것입니다.

Q. 그러나 당신을 포함해서 이러한 프랑스 사상의 우경화에 맞서 싸우는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식인들의 발언이 갖는 힘을 믿지 않으십니까 ?

랑시에르 - 상황을 타개할 몇몇 개인들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상황의 타개는 특권적 지식의 소유를 통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는 대중들의 민주적 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Q. 당신의 철학적 작업에서, 당신은 플라톤 이후 서구 정치사상이 « 아는 자 »와 « 모르는 자 »를 구분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교육받고, 합리적이고, 능력을 가지면서 지배하는 역할을 갖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무지하고 충동에 지배되면서 결국 지배당할 운명인 서민계층이 있다는 것 구분인데요. 이러한 분석틀이 현재의 상황에 적용됩니까 ?

랑시에르 - 오랫동안, 지배자들은 신중함, 중용, 지혜 등과 같은 계몽된 계급에 부여되는 덕목으로 치장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오늘날의 정부들은 과학, 경제을 이용합니다. 정부들은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선언된 법칙들 – 기적과도 같이 지배계급들의 이해와 일치하는 – 을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40여 년 동안 지배자들의 낡은 지혜와 새로운 경제과학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적 재앙과 지정학적 혼란을 지켜봤습니다.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것은 단지 자신들을 무시했던 지배자들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경멸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이 민주적 능력을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페이스북, 유럽체류 한인 사회과학연구 모임 엄형식 선생님의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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